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54. 의로운 심판(계15:5-16:9)

1.모세와 어린양의 찬양 이후,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렸다.
‘증거의 장막’(민17:7-8)은 성막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을 강조한 표현이다. 일곱 대접 재앙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는, 제사장의 사역을 의미하는 세마포 옷을 입고 있다. 하나님께서 시행하시는 일곱 대접의 재앙이,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해 이미 허락된 구원을, 이 땅 가운데서 완성시키는 과정의 일환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인해 성전에 연기가 가득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이 광경은, 일곱 천사가 행할 재앙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더욱 명확히 해준다.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들어 갈 자가 없었다(15:8b)는 말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거나, 범접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환상을 전개하셔서, 성도들로 하여금 진행될 종말이 어떠할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해주심으로써,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이 말씀 앞에 서도록 하신다. 전율할 만큼 참혹하지만, 택하신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노래하는 찬양의 제목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주심으로써 안위해 주신다.
2.이윽고, 성전에서‘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라는 음성이 나온다.
이 음성에 의해, 일곱 대접의 재앙이 시작된다. 그 전개는 나팔 재앙과 몹시 유사하다. 나팔이 부분적인 재앙이었다면, 대접은 그 범위가 총체적이라는 점만 다르다. 첫째 천사가 대접을 ‘땅에’ 쏟으니, 짐승의 표를 받은 자와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게 된다.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고통과 심리적인 고충이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 직면하는, ‘무질서와 혼란’을 가리킨다. 둘째 천사가 대접을 ‘바다에’ 쏟자, 바다가 죽은 자의 피처럼 되고, 바다 속의 모든 생물이 죽는다. 바다는, 무저갱과 같은 어근을 지닌 단어이며,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영역으로 악의 근원지라는 뜻이다. 영적으로는, 이러한 의미의 바다가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또한 현실세계에서는 무역을 근간으로 하는 경제적 토대가 무너짐으로써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도 아우른다.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니 피가 된다. 생존에 필요불가결한 요소가 고갈되는 기근을 암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던 이들이 받을 경제적인 심판을 의미한다. 넷째 천사는 ‘해에’ 대접을 쏟으니, 해가 권세를 받아 사람들을 불태운다. 해와 달과 별(日月星辰)로 대표되는, 각종의 ‘우상숭배’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의지의 표명이시다. ※ 일월성신(日月星辰): 해와 달과 별을 통틀어 이르는 말
日(해) 月(달) 星(별) 辰(별, 시기, 날짜, 때)
3.그런데, 이렇게 연이은 재앙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재앙을 당하는 이들은,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회개치 않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도와 계획대로 움직여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월성신(日月星辰)뿐 아니라, 나무토막이나 돌덩이일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준다면, 공의롭다고 인정한다. 하나님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탓이다. 자신의 생존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께서 진노 중에서도 베풀어주시는 긍휼의 결과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비방하며 회개하지 않는다. 반면에, 천사들은‘하나님의 심판이 의롭다’고 한다. 심판받는 자들이 성도와 선지자의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또한, 제단에서 들려오는 음성도‘이 심판이 공의롭다’고 한다. 이처럼, 이 심판이 진정 공의로운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제물로 드려지게 하심으로, ‘이미’ 그들의 죄의 댓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생명과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문과 길을 여셨지만, 악한 자들은 끝내 외면하여 심판을 당한다.
4.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심판으로 인한, 악한 자들의 낭패와 곤경을 보며 통쾌함을 만끽하고자 하는가? 위임받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압도하고 악한 세력을 굴복시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를 바라는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가리고 복음의 역사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던, 십자군전쟁의 동기가 이러한 오해에서 촉발되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그리스도께서는 원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시고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역사와 심판이, 의롭고 거룩한 것임을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 죽임으로 드러내셨듯이 우리도 늘 그렇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게 해줘야 한다(롬12:14-21)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삶으로, 하나님을 투영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화목제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종말론적인 신앙의 자세다(겔3:17-19) 심판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맡긴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실현하셨던 그리스도의 방법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면서 구현해야 한다는 의미다. 본문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근본 이유다.
5.(맺는 말)
날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어떤 삶이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구현하는 삶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하나님을 비방하며 회개치 않는 자들과 달리,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우리가 회개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길 바란다. 새로운 피조물로써의 삶을 살아가려면, 이 말세의 때에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로움과 거룩함을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원수를 위하여 축복하고 먹이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주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