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63.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계19:1-6)

(도입) 신약성경에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의‘할렐루야’가 네 번 쓰였는데, 그 모두가 오늘의 본문에 있다. 큰 음녀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택하심을 받아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은혜의 시간’임을 표현한 찬양이다.
1.그 찬양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 심판의 의로움과 참됨’을 선포하며 시작한다.
그 때, 큰 성 바벨론이 불타며 멸망할 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이 영원하듯이, 이에 대비되는 바벨론의 멸망도 영원할 것임을 십사만사천의 무리가 또 다시 할렐루야로 찬양했다. 이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도 보좌를 향해 엎드려 ’아멘‘으로 화답하며 찬양한다. 그러자 보좌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두 다 우리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라‘고 촉구한다. 이 음성에 따라,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 또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십사만 사천의 무리가 함께 보좌를 향하여 찬양을 올렸다. 그 찬양은,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 많은 물소리, 큰 우렛소리에 비견될 만큼, 장엄하고 우렁찼다. 하나님의 심판이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잘 드러내는 찬양이다. 하나님의 열심이, 하나님을 향해 감격과 감사를 외치며 부르짖듯이 찬양을 올려드리는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2.이렇게 찬양하는 대상은 누구여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본문은, 찬양의 대상이 하나님이시라고 명시하고 있다(:4,5) 우리의 경배를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참으로 공의로우시고, 참되게 심판하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억울함과 고통을 들으시고 해결해주시며,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실 능력을 가지신 유일한 분이시다. 그런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처럼, 하나님을, 굳이 ‘우리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뭘까? 우리가 특별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식시켜주시기 위함이다. 초대교회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신앙 때문에, 사도요한은 유배된 상태였다.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일부는 투옥당했고, 또 다른 이는 사자의 먹이로 던져지거나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혼자 내팽개쳐졌다며 충분히 좌절할만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환란에 직면한 그들에게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혼자가 아닌’ 우리(모두)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셨다. 하나님은 성도를, 개인이 아닌 ‘우리’로 부르셨다. 홀로 두지 않으신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신다. 소그룹모임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성도된 우리의 공동체성을 확인하고 함께 누릴 때, 이런 은혜의 찬양이 가능하다.
3.누가 이와 같이 놀라운 찬양을 드릴 수 있을까?
하늘에 있는 허다한 무리인, 십사만 사천과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다(:1,4)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존재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존재, 즉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에 대한 감격과 감사의 찬양이, 가슴으로부터 단 한 번도 우러나온 적이 없다면, 안타깝지만 아직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필수불가결하다. 지금, 삶을 어떤 노래로 채우고 있는가? 그 노래는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반영한다. 그래서, 신앙의 현 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구원의 감격과 그 영광으로 채워져 있는 성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찬양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감사와, 회개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은혜 안에 있는 자는 찬양하게 되어 있다.
4.그렇다면 어떻게 찬양해야 할까?
큰 음성으로(:1) 많은 물소리나 큰 우렛소리와 같이 들리게 해야 하며(:6)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며(:4) 찬양해야 한다. 큰 음성과 큰 소리는, 힘을 다하는 찬양을 의미한다. 진심으로 감격에 겨워, 열심을 다해 올려드리는 찬양을 가리킨다. 엎드려 경배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굴복하는 자세가 되어야만,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는 찬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과 영광은, 우리의 전 인격을 모두 쏟아낼 수밖에 없는 감격과 기쁨이다. 하지만, 아무리 쏟아내도 턱없이 부족하여 그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5.(맺는 말)
코로나19의 전 세계적인 창궐은, 예배와 찬양이 참으로 소중하지만, (호흡을 위해 꼭 필요한 공기처럼)‘당연하다’고 여겼기에 그 소중함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는 어리석음을 일깨워 준다. 개인의 경건생활도 그렇다. 우리가 흔히 넘어지는 경우는 엄청난 장벽이 아니다. 정말 일상적이고 당연한 부분인 ‘말씀과 기도, 예배와 묵상의 삶’에서 걸려 넘어진다. 고난이나 역경이 앞을 가로막을 땐,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님 앞에 엎드려 은혜를 구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여정은, 승리보다는 실패의 자리에 있을 때가 더 빈번할 수 있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신앙의 일상’을 회복해야 한다. 예배와 찬양, 말씀과 기도를 회복해야 한다. 또 다시 새해가 되었다. (참고 참으시며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해 더 기회를 주셨다는 뜻이다. 은혜의 누림을 허락하시고 그것을 함께 누릴 기회를 한 번 더 부여받은 것이니, 어떻게 해야 할까? 금식기도와 같이 어려운 일을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은 실천하기 힘들고 어려운 일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마11:28) 하나님은 우리의 당연하고 일상적이며 평범한 신앙의 삶을 통해 역사하신다. 이제, 새로운 한 해를 또 다시 허락해 주셨으니, 신앙의 일상, 특히 찬양의 은혜가 풍성한 삶을 살아내길 바란다.
1.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는 백마를 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