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52. 주의 진노를 아는 지혜자(계14:14-20)

(도입) 일곱 나팔의 재앙에 대한 묘사 후, 일곱 대접의 재앙에 대해서 서술할 것인데, 그 사이에는 막간이 있다. 이 막간은, 예수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영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며 설명하고 있다. 본문은 이러한 막간의 종착점이다. 심판을 추수에 비유하면서 대미를 장식한다. 크게, 땅의 곡식을 추수하는 전반부와, 익은 포도를 거두는 후반부로 나뉜다. 이는, 예수님이 천국을 ‘알곡과 가라지의 추수’로 비유하셨던 말씀(마13:23-30)이 실제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1.땅의 곡식을 추수하는 이는, 흰 구름위에 있는 인자와 같은 이다.
이분은 예수그리스도시다. 흰 구름이,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하심과 영광의 찬란함을 나타내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변화산에서도 희고 빛난 구름이 예수님을 둘러쌌었고, 승천하실 때에도 등장했다. 그의 머리에 있는 금 면류관은, 보다 더 확실한 증거다. 그리스도의 ‘왕적 주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자’라는 명칭은 다니엘서에서 ‘오실 메시야’에 대해 사용했고,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을 ‘인자’라고 자주 표현했었다는 점에서 더욱 명확하다. 또한, 그 손에는, 추수를 위한 낫이 있다는 사실도 힘을 실어준다. 심판을 추수로 비유했는데, 최종적인 심판자가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가지신 낫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순식간에 곡식을 거둘 만큼 예리했다. 심판자이신 예수님의 힘과 권능이 충만함과 추수할 준비가 이미 완벽했음을 뜻한다. 그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으로부터 나온 천사가 흰 구름위에 있는 인자와 같은 이에게 ‘추수의 때가 되었(으니 수확해야 한)다’는 성부 하나님의 ‘계획’을 전했다. 성자 예수님이 이 계획을 ‘실행’하여 알곡을 거두어 천국 창고에 들임으로써, 성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본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철저하게 수동적인 모습으로 일관하심을 보여준다. 비단, 본문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자신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존재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 언제나 수동적이셨다. 하나님의 뜻을 앞서려하거나,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항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태도를 견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패망한 이유는 불순종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한 열심을, 멈추시지도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 철저히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소망이 끊어지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삶도 피폐하게 되었다(렘25:1-11) 그러므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b)는 말씀을 신앙의 바른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2.한편, 천국창고에 들어가는 알곡과 달리, 가라지는 어떻게 될까?
본문에서는 가라지를 포도로 치환했다. 또 다른 천사에 의해 거둬진 포도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진다. 그 틀에서 짓밟혀서 나오는 피가 대단히 넓고 큰 강을 이룬다. 피로 이루어진 강의 깊이는 말굴레에 닿는(정도이니, 사람의 허리가 잠긴)다. 너무나 끔직하고 참혹하다!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과 결과의 참담함이 얼마나 몸서리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강의 크기를 나타내는 천육백 스타디온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보자. 땅의 숫자 4를 거듭 곱하고, 여기에 충만한 완전수 10을 제곱하여 곱하면 천육백이 된다. 이렇게 해서 ‘땅의 어디든지, 빈틈이 전혀 없고 예외도 없이’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임하는데, 이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하고 끔찍한 진노가 임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다른 의견도 있다. 천육백 스타디온은 320km인데, 통상, 가나안 땅의 북쪽인 단에서부터 남쪽인 브엘세바까지의 거리를 가리킨다. 즉, ‘가나안 땅 전체에 퍼질 만큼’ 엄청나다는 의미의 해석이다. 전 우주적인 엄중하고도 완전한 심판과, 그것으로 인한 모든 사악한 자들의 처절한 파멸을 의미한다.
3.(맺는 말) 이렇게 끔찍한 심판의 모습을 다시 반복해서 보여주시는 이유는 뭘까?
첫째, 종말의 심판이, ‘반드시 실현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시기 위함이다. 종말과 심판은 미래의 막연한 확률적 가능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해놓으신 실재다. 둘째, 영원한 복음인, 여호와를 경배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일깨워주면서 격려하시고 위로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는 성도의 눈물과 고통을 알고 계실뿐만 아니라, 반드시 보응해주신다는 의미다. 즉, 하나님의 심판이 종결되면 이제는 더 이상 고난을 겪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소가 제거 되었으므로, 자유로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위로와 격려가 된다는 뜻이다. 셋째, 우리로 하여금, 삶의 방향과, 지향점이 어떠한지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시기 위함이다. 모세는 인생이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고백했다(시90:10-12) 대부분의 삶이 이렇게 비참하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삶 이후에 직면할 하나님의 노여움과 진노는 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진정한 지혜는 우리의 남은 날을 계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했다(전7:4) 인생이 무엇이며 그 결국이 어떠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을 생각하며 묵상하게 될 때, 회개하며 감사하게 된다. 연약함을 깨닫고 돌이켜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넷째, 회개의 기회와 함께, 전도의 책임을 생각하도록 촉구하시기 위함이다. 심판의 참상을 느낄 때, 우리는 아직도 은혜 밖에 있는 부모와 형제, 친척과, 이웃과 지인을 생각해야 한다.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마28:19-20) 우리를 부르신 이유요, 교회를 허락하신 이유다. 우리가 부름을 받은 자로서의 감사와 감격의 찬양을 드리는 것도 복이지만, 그것과 아울러, 더 큰 은혜로 나아가는 비결은,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감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으로 응답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