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48. 땅에서 올라온 짐승(계13:11-18)

(도입) ‘하늘에서의 전쟁’에서 패배한 붉은 용은, 자신의 하수인인 ‘두 짐승’을 통해 땅에서도 전쟁을 일으켰다. 지난 시간에는 ‘두 짐승’ 중, 바다에서 나온 짐승에 대해 살펴봤었다. 오늘은, ‘땅에서 올라온 짐승’에 관해 함께 상고해보자.
1.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어린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했다(:11)
예수님을 상징하는, 죽임당한 어린양의 뿔은 일곱 개다(5:6) 완전 수 일곱이 상징하듯이, 예수님의 ‘구원자로서의 온전하고 완전한 권세와 능력’을 나타낸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도, 구원자를 상징하는 뿔을 가지긴 했다. 하지만, 두 개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 척하며 자신이 구원자라고 주장하나, 구원자가 되기에는 턱없이 미흡한 존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짐승은 용의 말, 즉, 용의 가르침을 전한다. 이 또한, 그가 구원자가 아니라는 단서가 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짐승도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와 놀라운 이적을 행한다(:11-12) 그 근원이 사탄이다.
2.둘째 짐승은, 이러한 권세로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한다(:12c)
땅에서 올라온 둘째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온 첫째 짐승을 섬기게 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거짓 선지자라는 뜻이다. 그는 첫째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사람들을 현혹하기 위해,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는 놀라운 이적을 행한다. 또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말을 하게도 한다. 첫째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죽인다. 땅에서 올라온 그는, 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권력에 기생하는 종교적 세력이다. 즉, 종말에는 ‘하늘에서의 전쟁’에서 패하여, 땅으로 쫓겨난 붉은 용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기 위해, 정치권력이라는 짐승과 종교적 세력이라는 짐승을 이용한다는 뜻이다. 배후는 사탄이다. 타 종교뿐 아니라, 왜곡되어 변질된 기독교의 세력도 포함한다. 사람들을 미혹하여, 충성심을 유발함으로써,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경배하게 한다. 이에 동조하며 추종하는 자에게는 그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한다. 표를 받지 않은 자는, 정치권력과 제도와 종교적인 권위로, 억압하고 격리하여, 경제적 불이익을 준다. 그 표가 육백육십육이다.
3.그러면, 육백육십육(666)이 뭘까?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로마의 황제 ‘네로’의 ‘게마트리아’ 표기일까? 아니다. 초대 교부들 중에 요한계시록을 이런 방식으로 해석한 이는 없었다. 또한, 모음이 없는 히브리어의 특성 때문에, ‘게마트리아’방식으로 변환할 때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다. 같은 단어를, 서로 다른 숫자로 치환하여 표현할 여지가 많기 때문에 ‘네로’라고 특정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굳이 666을 사용했을까? 6은 (짐승과) 사람의 숫자다(:18) 성경의 완전수 7에 미치지 못한다. 이렇게 ‘불완전함’을 세 번이나 반복한 숫자, ‘666’을 가진 존재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상징’한다. 아무리 꾸미고 위장해도 분명히 짐승에 속한자다. ‘상징’이므로, 누군가가 주장하듯, 바코드나 (생체이식 신분증 격의) 베리칩은 당연히 아니다. 역사적으로는, 중세의 십자군 원정이나, 일제강점기의 신사참배에 찬성한 교회 등등이다. 훗날, 관조하는 입장에서는 쉽게 알 수 있겠으나, 당면한 상황에서는 분별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지혜가 필요하다(:18a)
4.어떤 지혜가 필요할까? 둘째 짐승의 표를 받은 자를 분별하는 지혜다.
‘두 짐승’의 도발을 분별하는 기준은 예배다. 이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말세의 징조에 대해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시며 가르쳐 주셨다(마24:1-44) 성전이 파괴되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는 상황’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적그리스도의 출현,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나는 시점이다. 그 때가 되면,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세력이, 다양성이라는 명분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를 폐하고 모일 수 없도록 획책한다. 그 조짐은,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과 국회가 개원할 때의 대표기도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공식석상의 기도를, 중보자 예수님이 아닌, ‘다양한 종교의, 다양한 신의 이름’으로 드린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의 주장을 따라,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부정한다. 인본주의에 근거한, 평등과 차별철폐 등을 명분으로 하여, 왜곡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공적 예배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삶으로 드리는 예배도 사라진다. 예배의 이유와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한다(마24:42, 25:13) 시험을 당할 때,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인내하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구해야 한다(약1:2-5, 계13:10)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엎드려 간구해야만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배와 말씀이라는 두 날개로 양육해주신다.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받기에, 구비하여(=온전하고도 성숙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키워내신다.
5.(맺는 말)
하늘에서 이 땅으로 쫓겨난 붉은 용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넘어뜨리려한다. 정치권력과 거짓된 선지자 역할을 하는, 변질된 종교를 이용해서 진리에서 이탈하게 한다. 우상을 숭배하게 하고 헌신하게 하여 그들의 표를 받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땅에서 만족을 얻는듯하게 만든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인양 착각하며 살아가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한 분별력과 지혜를 얻게 하시려고 본문의 ‘두 짐승’을 통해 미리 경고해주신다. 바른 국가관과 바른 신앙, 기독교신앙에 기초한 바른 세계관을 분명히 정립해야만 넘어지지 않게 된다. 이것이 영적 분별력과 지혜가 필요한 이유다. 이 지혜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만 얻을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시대의 어떠한 도전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인내하여 승리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