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적용
적용은 필수인가요?
저는 “적용 없이 묵상 없다!”, “묵상 없이 적용 없다!”라고 외칩니다. 성경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은 성경을 살아 내기 위한 것입니다. ‘앎’과 ‘삶’이 일차함수처럼 단순하고 단선적으로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어서도 안 됩니다. 묵상의 궁극은 실천입니다. 실천되지 않는 묵상은 묵상이 아닙니다.
그것을 잘 보여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야고보의 단호함이 느껴지십니까? 피할 길도, 돌아갈 길도 허용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저 강직함은 읽기만 하고 적용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얄팍한 꼼수를 호되게 꾸짖습니다.
우리는 왜 적용하지 않고 읽는 것으로 만족하려 들까요? 적용하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기 싫은, 죽어도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축복하라는 말씀과 설교는 듣기에는 달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 행하는 것은 참으로 아픕니다. 가슴이 베이고 칼날에 찔리는 통증을 견뎌야 하지요. 그러니 그냥 듣고 “아멘” 하는 것으로 끝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기만이지 묵상일 수 없습니다.
또 하나 묵상과 적용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 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요한복음에서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분, 창조하신 분, 곧 하나님이신 분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분은 역사 이전에서 역사의 한복판으로, 창조주로서 피조물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리스 철학과 신화에서 말씀, 곧 로고스는 몸이 없습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육체가 없습니다. 몸으로 나타나지 않는 말씀, 몸으로 살아 내지 않는 말씀 읽기는 기독교 묵상과 거리가 있습니다. 묵상은 반드시 육신을 입어야 하고, 아니 육신이 되어야 하고, 육신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타인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 곧 살아 계신 그분의 현존을 목격하게 됩니다. 다시 외칩니다. “적용 없이 묵상 없다!”
적용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저는 적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적용하지 않고도 그날 묵상을 마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이 목적이자 지향이지만, 적용을 위해서만 묵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읽어도 됩니다. 그냥 말씀이 좋아서, 말씀이 나를 살리니까, 말씀이 내 길의 등이요 빛이니까, 온종일 그리고 틈나는 대로 입에 담고 다니지요. 물을 머금은 스펀지가 되는 겁니다. 쥐어짜지 않아도, 비틀지 않아도 저절로 물이 뚝뚝 떨어지지요.
둘째, 적용이 어려운 본문이 많기 때문입니다. 스가랴서와 같은 예언서나 레위기 같은 본문 말이지요. 웬 제사가 이리 많은지. 그것들 사이에 변별점을 찾으려면 진땀을 흘려야 합니다. 게다가 돌아서면 금방 잊기 일쑤고요. 성전 건축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건물 크기와 모양, 성전 내 기물에 관한 긴 설명을 읽자니 건축에 관한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는 통역 없이 방언 기도를 듣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족보는 또 어떻고요. 발음조차 어려운, 성경에 딱 한 번 나오고 마는 인물들의 이름으로 꽉 찬 본문을 읽고 무엇을 어떻게 적용하란 말입니까? 그럴 때는 말 그대로 그냥 읽는 수밖에 없습니다. 억지로 적용점을 찾다가 성경이 더 싫어지고 어려워집니다. 하루이틀 하다가 그만둘 것도 아닌데,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아요. 어려우면 그냥 읽기만 하세요.
셋째, 같은 적용을 되풀이하게 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서의 경우에는 동일한 주제가 반복됩니다.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다를 수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들어야 하고, 오늘 내 삶에 실천해야 하는데, 어쩌란 건지. 비슷비슷한 말씀을 읽고 세미하게 분별해 약간이나마 다르게 적용할 점을 찾아야 하는데 잘 안 됩니다.
사실 한 주제가 반복되는 본문이 연속될 경우, 같은 적용을 반복해도 됩니다.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요. 잘 안 되니까, 한 두 번의 말로 실천이 안 되니까 계속 같은 말ㅇ르 하는 건데, 구태여 적용이 달리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음 날도 어제의 그 적용을 하는 거지요. 성경이 반복하면 나도 반복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될 이유가 있나요? 성경이 반복해 강조한 다면, 한편 묵상이 되새김이라면, 적용 또한 되풀이하는 것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용감하게 같은 적용을 또 하세요. 괜찮습니다.
넷째, 무리하게 적용하다 부작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끼 먹고 한 끼 살자!” 무슨 말이냐고요? 한 끼의 식사로 하루를 산다거나, 그날의 별미를 잊을 수 없어 그 식사로 며칠을 살 수 없지요. 그러니까 하루 묵상으로 하루에 맞는 적용을 하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한 끼 먹고 한 끼 살고, 하루 묵상하고 하루 적용하자!” 그러니까 성경을 읽으라는 도전을 받으면 그날 하루 열 장을 읽으면 족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기로 적용한 그날, 기도로 한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찬양도 조용한 곳을 찾아 실컷 찬양이면 충분합니다. 무죄하게 한 달, 일 년 치를 적용하지 마세요.
말씀은 밥이다
말씀은 밥입니다. 묵상은 밥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한 끼 식사를 맛나고 푸짐하게 먹는다고 내 몸이 갑자기 좋아질 리 만무합니다. 끼니를 거르지 않고 규칙적으로 식사하고 운동하고 깊은 잠을 달게 자다 보면 나도 모르게 키가 훌쩍 크고 몸도 튼튼해집니다.
당장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여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싶더라도, 기억하십시오. 묵상은 밥 먹는 것과 같다는 것을. 입맛이 떨어져도, 먹기 싫어도 조금이라도 먹어야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적용한 대로 살아가지 않아도 또 묵상하십시오. 그렇게 성경에 젖어들고 물들다 보면, 큰 바위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큰 바위 얼굴을 닮게 된 사람처럼 당신도 성경의 사람이 될 겁니다.
성경의 능력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 겁니다. 성경은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딤후 3:16). 내 의지와 노력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억지로 무리하게 적용하려다 내 영혼의 어깨나 허리를 다칠 수 있습니다. 그러다 그만 묵상할 의욕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그러니 오늘도 성경이 좋아서 하루 종일 중얼중얼 읊조리다 보면 깊이 우려낸 맛에 심취하게 됩니다. 그렇게 내 몸의 피가 되고 살이 된 말씀은 마침내 내 영과 맘과 몸을 능력으로 빚어 낼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말씀을 읽고 또 읽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이자 최대의 적용입니다. 오늘도 그 적용을 하셨겠지요?
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 김기현/ 성서유니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