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기도: 묵상과 기도를 통합하라
기도하고 읽어라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루터의 말입니다. 다른 문헌과 달리 성경은 펼쳐서 읽을 책이 아니라 기도한 다음 읽는 책입니다. 왜 기도부터 드려야 할까요?
신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말하는 쪽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때에 그분의 뜻을 다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분더러 “지금 내게 말씀하십시오”라고 명령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조종할 수도, 쥐어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의 여부는 오롯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지요. 그분이 입을 열어 말씀하지 않으시면 그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제자가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듯 정중히 하나님께 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셔야 볼 수 있기에 마치 제 눈도 스스로 뜨지 못하는 갓난아이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내 눈을 열어 주십시오. 그래야 내가 주님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볼 것입니다”(시 119:18, 새번역).
이제 인간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말씀 들을 준비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칼뱅이 말한 네 가지 기도 법칙을 소환하려 합니다.
첫째는 내적 집중입니다. 산만하고 분주한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해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는 참된 갈망입니다. 형식적인 기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간절함이 요구됩니다. 절실히 구하는 자가 얻고, 찾는 자가 찾을 것입니다.
셋째는 겸손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할 때 내 생각을 하나님에게 투사하기 쉽습니다. 칼뱅은 “올바른 기도의 시작과 끝, 그 준비는 겸손하고 성실하게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간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은 확실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소망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의 기도는 무력해지고 맙니다.
지금까지 묵상을 위한 기도의 자세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묵상을 위한 기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자기만의 찬양을 부르거나 자유롭게 자신의 언어로 기도하면 됩니다. “주님, 주의 말씀을 읽습니다. 제게 말씀해 주시고, 잘 깨닫고 실천하게 해주십시오.” 더 간단하게 “주님,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도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묵상을 위해서는 말씀으로 드리는 기도가 제격입니다. 실제로 “루터는 성경을 큰소리로 읽는 형식의 묵상을 기도의 서두로 사용했습니다.” 어린 사무엘의 기도,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나, 묵상에 관한 구절이 수두룩한 시편 119편, 또는 시편 1편, 23편, 주기도문 등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기도문입니다.
성경 구절을 천천히 되뇔 때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고, 내 안에 갈망이 일어나며, 말씀 앞에 겸손해지고, 오늘도 말씀하신다는 소망과 믿음이 생겨납니다. 묵상을 준비하는 데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기도하며 읽어라
묵상하기 전에 기도를 드린 다음, 본문을 반복해 천천히 읽습니다. 이때 관찰, 해석, 적용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읽기에 기도도 포함된다고 봅니다. 선언적 형태로 말하면, 말씀 읽기는 곧 기도입니다. 본문을 소리 내어 조용히 읊조리는 행위 자체가 기도입니다. 대표적으로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이자 우리의 기도입니다. 시편을 읽는 것은 곧 기도하는 것입니다. 비단 시편뿐이겠습니까. 모든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말씀을 읽음과 동시에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하며 읽으라는 말은 묵상의 전 과정을 기도로 이어 가라는 말입니다. 기도는 묵상이 끝난 다음, 갑자기 튀어나오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함께하는 것입니다. 묵상의 모든 과정과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 기도라야 합니다. 손을 턱에 괴고 골똘히 생각하는 자세가 아니라, 머리를 조아린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자세로 이뤄져야 합니다. 경건의 시간은 나 홀로 생각하는 자문자답이 아니라 하나님과 주고받는 대화이자 문답입니다.
그러면 읽기를 기도로 승화하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읽는 것입니다. 그냥 자꾸 읽으십시오. 기도하듯 천천히 반복해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십시오. 그러다가 마음에 와닿는 구절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되풀이해 읽습니다. ‘한 줄 묵상법’을 따라 한 단어, 한 구절을 세심하게 읽고, 성경 이야기와 내 이야기를 동일시하며, 성경 이야기에 내 마음을 담아 감정을 실어 읽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라고 물으십시오.
둘째, 단어를 살짝 바꾸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와 같은 구절에서 ‘나’에 자신의 이름을 넣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족이나 친구, 교우의 이름을 넣어 읽습니다.
셋째, 문장 끝 부분을 기도로 슬쩍 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시오. 나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고, 주님과 교회로 인도해 주십시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이 기도가 됩니다.
끝으로, 풀어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어 주셔서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게 해주시고, 관계에 어려움이 없게 하시며, 영적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그가 하는 모든 일,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의 목자가 되어 주셔서 그 어떤 것도, 그 무엇도 부족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는 ‘성경 구절을 내 기도의 언어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자연히 나의 본문 관찰과 해석이 섞이게 됩니다.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은 말씀을 해석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시편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성경 묵상에도 적용 가능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숱한 기도문은 그 자체가 기도이니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서신서는 한 단어, 한 구절로 기도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복음서나 역사서와 같은 이야기 본문은 한 단락 전체를 읽으면서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로 읽는 것은 말씀이 기도 되게 하는 기도 방법일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묵상을 위한 최상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묵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원뜻이 되새김질이라고 했습니다. 오래오래 곱씹는 것이지요. 그냥 읽으면 의지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로 읽으면 저절로 되풀이 읽기가 되고, 말씀 이해가 깊어지며, 내 마음과 기억, 몸에 아로새겨집니다. 지금까지는 읽기를 위한 무미건조한 읽기였다면 이제부터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묵상이 될 것입니다.
기도는 기도
말씀 읽기도 기도이지만 결국 기도는 기도입니다. 제가 묵상과 기도는 별개가 아니며 말씀 읽기도 기도라고 했지만, 최종심에서 기도와 말씀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묵상이 기도가 될 수 있지만, 결국 묵상과 기도는 다릅니다. 기도를 해야 기도를 한 것입니다. 말씀을 읽었다고 기도를 다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구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부드럽고 인격적인 대화이지만, 고함치며 격렬하게 다투는 논쟁일 때도 있습니다. 떼쓰고 응석부리는 아이처럼 소원하는 바를 달라고 강청할 때도 있어야 하지요.
그런 자유로운 나만의 기도 시간이 없다면, 내 속사람은 체한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낄 것입니다. 주님께 하고픈 말을 다 하지 못한다면 누구에게 하겠습니까? 그분이 우리에게 하고픈 말씀을 성경 66권에 담으셨다면 우리도 주님께 하고픈 말을 기도 시간에 담아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냥 기도하십시오. 형식에 얽매이기보다는 어눌하더라도 내 언어로 마음을 토로하는 기도가 아름답습니다.
자유롭게 기도하되 두 가지를 기억했으면 합니다. 첫째, 우리 기도에는 남을 위한 기도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내 영혼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기준 중 하나는 내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간구하느냐에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주변 이웃, 우리 사회, 그리고 세계를 위한 기도도 빼먹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내 할 말만 실컷 하고 기도를 마친다면 그것은 어긋난 대화이자 일방적인 대화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면, 우리는 대화의 파트너인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잘 들으시고 응답하시듯 말입니다.